16 ♧------------------------- 놂 간들...060901

2010. 1. 7. 11:57아름다운 삶/1.초하룻글


 


 

 

 

   

 

                                           놂 간 들

          

 

 

 

 

 

 

 

  

              소 백 산   계 곡 수 야               

              빨 리  감 을    자  랑  마  라

 

 

 


                   한 번   가 면  ~   

                   다 시 못 올    삶    

 

 

 

               달 빛  어 린   청 산   품 에   

               놂 간 들   어 떠 리

 

                                

                       ---황진이의  <청산리 벽계수야.....> 에서

 

 

     2006년 9월 1일   ♣ 윤 기 

 

 

 

                     

  소백산 계곡수야 !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소백산 희방폭포.

                            소백산   자락을 흐르는 계곡 중에 가장 크고 뛰어난 폭포가

                     희방폭포 이다.

                     높이 20m에서 직하강하는 물줄기를 보면, 속이 시원해지고

                     쏟았던 땀방울도 순식간에 사그러 들 정도다.

                                                

                     폭포에서 5분 쯤 올라가면 희방사가 있다.

     

 

 

 

 


    

황진이(黃眞伊)     이미지 썸네일


황진이는 16세기에 활동한 우리 나라의 이름 있는 기생이다. 그녀는 개성에서 살던 황진사의 첩의 딸로 태어났다. 호는 명월이었다.

   황진이는 어려서부터 수려한 용모에 서예와 가무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서 그 소문이 각지에 퍼졌고 또 많은 일화도 남겼다.


황진이가 15세 되던 해의 일화이다. 한동네에 살던 총각이 그녀를 짝사랑하던 나머지 상사병에 걸려 죽었는데, 총각의 상여가 황진이의 집대문앞에 이르자 말뚝처림 굳어져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죽은 총각의 친구 가 이를 황진이에게 알이자 황진이는 소복단장을 하고 달려나가 자기의 치마를 벗어, 관을 덮어 주었는데 그 제서야 상여가 움직이더라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일로 인하여 그녀가 기생이 되었다고도 한다.

    
황진이는 첩의 딸로서 멸시를 받으며 규방에 묻혀 일생을 헛되이 보내기 보다는 봉건적 윤리의 질곡 속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기를 원하였다. 그 결심을 실천하자면 당시 그의 신분으로서는 불가능하였으므로 오직 길이라면 기생의 인생을 걷는 것이었다.


당시 개성 사람들은 용모와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황진이를 화담 서경덕.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 3절(3가지 뛰어난 것)으로 꼽으며 자랑하였다. 황진이는 주로 남녀간의 애정을 짙은 서정으로 섬세 하면서도 자유분방하게 표현한 작품들을 많이 남겼는데 이 시조는 그러한 대표작의 하나다.

 


       청산은 내 뜻이요 녹수는 님의 정이요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손가        
       녹수도 청산 못잊어 울어예어 가는고    


자유분방한 성격의 황진이는 경치 좋은 곳을 유람하기를 좋아했는데 그러한 황진이가 금강산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날 그의 명성을 듣고 있던 서울의 한 젊은이가 개성으로 놀러 왔다. 유람을 좋아한다는 그의 말에 황진이는 금강산을 같이 가자며 말했다.
"이웃나라 사람들도 우리나라에 태어나 금강산을 한번 보는 것이 원이라 하였거든 우린 조선 사람으로서 제나라에 있는 금강산을 못본다면 어찌 수치가 아니겠소. 우연히 당신을 만나고보니 가히 동무하여 유람을 갈 만하오."
젊은이도 선뜻 응해 나섰다.


황진이는 번잡한 행장을 다 버리고 굵은 삼베치마를 입고 망태를 썼으며 손에는 지팡이를 들었다. 동행인 젊은이 또한 무명옷에 삿갓을 쓴 봇짐차림 이었다. 얼핏 보면 허물없는 오누이 같은 그들의 차임새는 까다로운 남녀간의 예의범절을 벗어나 금강산의 경치를 마음껏 즐기려는 여유가 엿보였다. 유람길에 나선 그들은 수 백리 길을 걸어서 금강산에 이르렀다. 과연 소문대로 금강산의 절경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으며, 날마다 희열에 넘쳐 금강산의 명소들을 둘러보며 서로 노래도 부르고 화답시도 지으며 산천경개를 즐기느라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꿈같은 유람에 어느덧 노자도 떨어져 거의 굶다시피하는 지경이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같이 갔던 젊은이와도 헤어지게 되었다. 그러한 지경에도 황진이의 유람은 계속되었다. 여행중에 다친 다리를 이끌고 민가나 절간에서 밥을 빌어 먹으면서도, 금강산의 명소들을 다 돌아보고서야 그곳을 떠났다. 한 여인의 행적으로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이 이야기는 황진이의 성품이 가장 잘 나타난 일화이다.


마흔살을 전후로 하여 세상을 떠난 황진이는 살어 생전에 많은 일화와 시를 남겼지만 금강산을 노래한 그의 시가 남아있지 않음이 유감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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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  글                                               
 

 

이상목 선생님은 역시 여유로우시다,,, 세상살이 너무 빠듯하게 살지 말고 즐겁게 살아가자고요,,, 06.09.01 21:44                              
 
 
정연춘 가을 문턱에 이렇게 멋진 시조 한수 읊어 주시니 고맙습니다...선생님께선 역시 예나 지금이나 저의 글 스승 이십니다 06.09.05 0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