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주향교 추계석전-2011

2011. 9. 28. 19:35아름다운 삶/2.국내현장체험

 

 

   

  영주향교 추계석전

 

                                                              .榮 州 鄕 校 秋 季 釋 奠 2011.09.28

 

                                                            

         

                

                                                                                                                  

 

 

 

영주향교 대성전 

 

 

 영주향교는 경상북도 영주시 하망동 167에 소재하고 있으며,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3호 이다.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고려 공민왕 17년(1368)에 군수 하륜(河崙)이 처음 지은 후 여러 차례 수리하였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로는 대성전을 비롯하여 동무·서무, 명륜당, 동재와 서재, 존현당, 횡루, 전사청,

 전곡청 등이다. 대성전은 총 6칸 규모의 건물로,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

지붕이다.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부리 모양으로 장식한 익공 양식으로

 꾸몄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한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

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석전

 

       석전 []

[정의]
문묘, 곧 성균관의 대성전에서 공자를 비롯한 선성(先聖)과 선현(先賢)들에게 제사 지내는 의식. 모든

 유교적 제사 의식의 전범(典範)이며,  규모가 큰 제사이다.

 이 때문에 석전을 가장 큰 제사라는 의미로 석전대제(釋奠大祭)라고 부르기도 한다.

 198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되었다.

석전은 희생(犧牲)과 폐백(幣帛) 그리고 합악(合樂)과 헌수(獻酬)가 있는 성대한 제사 의식이다.

[어원]
 석전의 석(釋)은 놓다[舍] 또는 두다[置]라는 뜻을 지닌 글자로서 베풀다 또는 차려놓다라는 뜻이다.

 전(奠)은 상형문자로서 추(酋)는 술병에 술을 담아놓고 덮개를 덮어놓은 형상으로 빚은 지 오래된 술

을 의미하며, 대(大)는 물건을 얹어두는 받침대의 모습을 상징한다.

 따라서 이는 정성스레 빚어 잘 익은 술을 받들어 올린다는 뜻이다.

석전은 정제(丁祭), 또는 상정제(上丁祭)라는 별칭으로도 불렀는데, 이는 석전을 매년 봄과 가을에 걸쳐

 두 차례 음력 2월과 8월의 상정일(上丁日)을 택하여 봉행해 온 데서 비롯된 것이다.

[유래]
한국에서는 유교가 전래된 후, 신라에서 공자와 10철 72제파의 화상을 당나라에서

가져와국학(:)에 안치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에서도 국자감(:

)에 문선왕묘 (문묘)를 세워 석전제를 지냈다.

 

.조선시대에는 개국 초부터 성균관 문묘를 설치하고 여기에 한국의 18현을 합한

 112위() 를 봉안하여 석전제를 지냈는데, 이를 위하여 성균관에 학전()과

학노비()를 지급하였으며 지방에서는 향교에서 석전제를 주관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37년부터는 양력 4월 15일과 10월 15일로 변경하여 실시하다가 해방 

 후인 1949년에 전국 유림대회의 결의로 5성위와 송조 2현만 봉안하고 그 외 중국 유현 108위를 매안(埋安)하였다.

 

이와 동시에 우리나라 18현을 대성전으로 올려 종향하고 춘추 석전 대신 공자 탄일인 음력 8월 27일에 기념 석전을 봉행하는 변화를 가졌다. 그 3년 뒤인 1953년에 공문 10철과 송조 6현을 복위하고 석전도 봄과 가을 두 차례, 곧 음력 2월과 8월의 상정일로 환원하여 현재까지 봉행하고 있다.

성균관뿐만 아니라 전국의 232개 향교에서도 정해진 절차에 따라 매년 같은 날 석전을 봉행하고 있다

영주향교에서도 옛 의식대로 해마다 봄과 가을, 2차례씩 석전을 거행한다.

 

 

[내용]

.석전대제에는 다섯 명의 헌관(獻官: 위패 앞에 잔을 올리는 제관)과 집례(執禮: 진행을 담당하는 제관),

대축(大祝: 제사의 축문을 읽는 제관)을 포함한 27명의 집사가 참여하며, 이와 더불어 문묘제례악(文廟

祭禮樂)을 연주하는 41명의 악사, 팔일무(八佾舞)를 추는 64명, 모두 137명의 대규모 인원이 동원된다.

집레 및 묘사가 먼저 섬돌 아래에서 4배를 올린 뒤 손을 씻고 자기 위치에 선다.

 

석전의 모든 절차는 종합 시나리오라고 할 수 있는 홀기(笏記)에 의거하여 진행되며, 국조오례의의 규격

을 그 원형으로 한다.

 

① 창홀(唱笏): 집례가 홀기를 부르기 시작한다. 전악(典樂)이 악사(樂士)와 무생(舞生)을 인솔하여 정

해진 위치로 입장하면, 찬인이 대축(大祝)과 모든 집사(執事)를 인도하여 섬돌 아래서 4배하도록 한다.

 대축과 모든 집사가 관세위(盥洗位)에 나아가 손을 씻고 각각 자기 위치로 가서 선다.

묘사 및 봉향(奉香)·봉로(奉爐)가 대성전으로 올라 문을 열고 개독(開櫝)한다. 알자와 찬인이 초헌관(初

獻官)·아헌관(亞獻官)·종헌관(終獻官)·분헌관(分獻官)을 인도하여 정해진 위치로 나아간다. 알자가 초헌

관에게 행사의 시작을 청하고 당하악(堂下樂)이 연주되고 문무(文舞)가 시작되면 헌관과 참례자 일동이

4배한다.

 

 

② 전폐례(奠幣禮): 폐백을 드리는 예로서, 초헌관이 공자 신위, 안자 신위, 증자 신위, 자사자 신위, 맹

자 신위 순으로 세 번 분향하고 폐백을 드린 뒤 자기 위치로 돌아온다. 이때 당상악(堂上樂)을 연주하고

 문무를 춘다.

 

③ 초헌례(初獻禮): 첫 번째 술잔을 올리는 예로서, 초헌관이 공자 신위 앞으로 가면 당상악과 문무가

 시작된다. 공자 신위에 술잔을 올리고 조금 물러서서 꿇어앉으면 대축이 축문을 읽는다. 초헌관은 안자·

증자·자사자·맹자 신위 순으로 각각 술잔을 올리고 자기 위치로 돌아온다.

 

④ 아헌례(亞獻禮): 두 번째 술잔을 올리는 예로, 아헌관이 공자·안자·증자·자사자·맹자 순으로 술잔을

 올린다. 당하악과 무무(武舞)가 연주된다.

 

⑤ 종헌례(終獻禮): 마지막 술잔을 올리는 예로, 종헌관이 앞의 순서대로 술잔을 올린다. 당하악과 무

무를 춘다.

 

⑥ 분헌례(分獻禮): 앞서 술잔을 올린 공자와 네 신위 이외에 종향(從享)되어 있는 사람에게 술잔을

드리는 예이다. 동종향분헌관(東從享分獻官)과 서종향분헌관(西從享分獻官)이 찬인의 인도를 받아 동종

향 17위, 서종향 17위에 술잔을 올린다.

 

⑦ 음복례(飮福禮): 제사에 쓴 술과 음식을 먹는 예이다. 초헌관이 알자의 인도로 음복하는 곳으로 나

아가 술과 포를 음복한다. 대축이 철상(徹床)을 한다. 당상악을 그치고 당하악을 연주한다.

 

⑧ 망료례(望燎禮): 제사가 끝나서 축문을 불사르는 것을 지켜보는 예이다. 알자가 초헌관을 인도하여

 축문 사르는 곳으로 나아가면 대축이 폐백과 축문을 불사른다. 알자가 초헌관에게 예가 끝났음을 아뢰

고 알자와 찬인이 헌관을 인도하여 물러감으로써 행사가 모두 끝난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영상편지 : 추계석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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釋奠에 같이 참석한 친구와.. ( 執禮: 朴憲緖,    謁者: 李在鐸 )

 

 

                                                                                                                                       

 동영상 : 추계석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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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참고자료

 

                          영주향교 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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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추계석전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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孔子(기원전551~479년)

 

 

1.공자의 출생

孔子(기원전551~479년)는 ‘술이부작(옛날 내려오던 것을 그대로 전수할 뿐 새롭게 창작한 것은 없다)’ 이라 하여 겸손했지만 요,순의 임금으로부터 문왕과 주공을 통해 내려오는 가르침을 창조적으로 전수한 이로, 공자에 의해 유교가 집대성되어 완전히 새롭게 태어난 의미에서 공자를 유교의 창시자로 본다.

영어로,Confucius 공부자의 라틴어식 표기로 유교를 서양에서는 Confucianism이라고 한다.

본래이름은 공구, 위대한 스승을 일컫기 위해 공자의 자를 붙였다.

춘추전국시대 노나라, 산동성 곡부(츄후)에서 태어나, 3살 때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가 공자를 홀로키웠고, 19세때 결혼, 관직에 잠깐 있었고, 37세에 주나라 수도에 가서 노자를 만나 꾸지람을 듣게 되고 50세쯤 재상비슷한 벼슬에 올랐고, 14년동안 제자들과 여러 나라를 다니며, 68세쯤 노나라로 와 가르치고 글쓰기에 전념, 72세에 죽어 공림에 묻혔다.

 

 

 


2.논어와 사서오경

영어로 The Analects of Confucius, 논어는 공자의 사후 그의 말, 제자와의 대화, 말들을 모아 엮었고 사상을 가장 잘 말해주는 자료로 동아시아에서 중요한 입지를 인정받고 있는데, 유교가르침의 바탕중의 하나가 되었다.

(사서오경 :: 사서- 대학, 중용, 맹자, 논어.... 오경서경, 시경, 예기, 역경, 춘추)

 

 

 


3.공자의 기본 가르침

1)정명: 이름을 바르게 함

누구나 주어진 이름에 맞도록 바르게 행동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보아

“임금은 임금, 신하는 신하, 아버지는 아버지, 아들은 아들이 되라.” 고 했다.

 

2): 논어에서 105번 출현 글자. 영어로 Humanity라고 번역하는것을 선호하는데

한마디로 정의 할 수가 없다.

인의 두가지 요소 솔직함(직), 예의바름(예)를 균형있게 유지해야 하고,

인은 사람이 사람답기 위해 갖추어야 할 필수덕목이라는 점에 틀림없다.

 

3): 이(利)와 대조를 이루는 덕목, 공자는 군자는 의에 밝고 소인은 이에 밝다고 하며

군자는 옳은일인가 물어보고 옳은일이라고 생각되면 이익이 올지 말지 결과와 상관없이 그대로 추진한다. Do for nothing!(뭘 바라고 하지 말라!)

 

4)충과 서 : 충은 적극적으로 다른사람을 생각하는 마음, 서는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게

행동하는 마음으로 예수의 황금률‘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것과 비교할 수 있다.

인이나 의가 구체적인 인간관계에 나타날 때 충과 서가 되는 것으로 지금여기를 중요하게 생각하라는 뜻으로, 실존주의에서 주장하듯 실존이 본질에 우선하다는 말과 비슷하다.

 

 

 

 

4. 공자의 업적

 

공자는 많은 제자들을 교육하여 인의 실현을 가르치는 한편, 자기자신도 그 수양에 힘써, “종심소욕불유구”라고 술회할 정도의 인격에 도달했기 때문에, 생전에도 커다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후에는 제자들이 각지에서 그 가르침을 전파 하였습니다. 그 후 한(漢)나라의 무제(武帝)가 유교를 국교(國敎)로 택함에 이르러 공자의 지위는 부동의 것이 되었으며, 한국에도 받아들여져 한국의 정치, 사회, 문화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처럼 공자의 사상은 사회적·정치적 인간을 위한 도덕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그 보편성을 보증하는 것으로서 하늘의 존재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공자로서는 하늘이 뜨거운 종교적 심정으로 받들어지는 불가지(不可知)의 존재였지만, 이는 인간적인 활동을 지원하는 신(神)일지언정, 인간을 압박하는 신은 아니었습니다. 공자의 사상은 어디까지나 인간중심주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한국의 정신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공자는 춘추 말기에 주나라의 봉건질서가 쇠퇴하여 사회적 혼란이 심해지자, 주왕조 초의 제도로 복귀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위정자는 덕이 있어야 하며 도덕과 예의에 의한 교화가 이상적인 지배방법이라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사상의 중심에 놓인 것이 인(仁)입니다. 공자는 최고의 덕을 인이라고 보고, 인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부모형제에 대한 골육의 애정 곧 효제(孝悌)를 중심으로 하여 나라를 다스리려고 했습니다.

 

 

인덕(仁德)을 지향하고, 인덕을 갖춘 사람만이 정치적으로 높은 지위에 앉아 인애(仁愛)의 정치를 한다면, 세계의 질서도 안정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 수양을 위해 부모와 연장자를 공손하게 모시는 효제의 실천을 가르치고, 이를 인의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오늘날까지도 한국의 유생들은 이러한 한국의 정신문화에 크게 기여한 공자를 기리기 위해 향교등에서 제를 올리고 있습니다.그의 사상은 논어나 시경등에 잘 나타나있습니다.      <출처: NAVER 지식백과>

 

 

 

영주향교 명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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